한중일 경제통상장관 협의 재개
한중일 경제통상장관들이 6년 만에 다시 만난 가운데, 서울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WTO 개혁과 3국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논의가 재개됐다. 그러나 각국 간의 입장 차이가 여전해 실질적인 성과는 미지수다.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이번 회의는 향후 동북아 경제 협력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WTO 개혁, 실효성 없는 선언으로 끝나나
한중일 경제통상장관들은 세계무역기구(WTO) 개혁의 긴급성과 중요성에 공감하면서도, 구체적인 합의 없이 원론적 수준의 논의에 그쳤다. 이번 회의에서 6년 만에 재개된 협의인 만큼 기대가 컸지만, WTO 분쟁해결기구(DSB)의 기능 정지 상태 등 현안에 대해 각국의 입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미국을 필두로 한 선진국 중심의 다자무역 질서에 대한 중국의 견제가 지속되면서, 한국과 일본은 고유의 이해관계 속에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가령 일본은 WTO를 통한 분쟁해결 메커니즘의 복원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한국은 디지털 통상과 기후 변화 대응 같은 새로운 이슈를 WTO에서도 다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중국은 DSB의 신속한 복원을 주장하면서도,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보조금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는 적극 방어적인 태도를 띠었다. 이러한 차이는 WTO 개혁과 관련해 실질적인 조율이 어려움을 나타낸 사례로 해석된다.
또한 이번 회의는 코로나19 이후 세계 공급망의 재편,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 심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국제 정세 변화 속에서 WTO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한 상황에서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국은 "WTO의 중심적인 역할을 재확인한다"는 수준의 선언만 반복했고, 개별 쟁점에 대한 실질적 방안은 내놓지 못했다. 이로 인해 전문가들은 현행 논의 구조로는 WTO 개혁을 위한 중대한 전환점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특히 WTO의 기능 복원이라는 중대 사안을 논의하면서도, 3국이 공동으로 낸 결과 문서에서는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나 일정 등이 빠져 있었다. 이는 다자간 무역 체제를 고도화하고자 하는 국제사회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라는 평가다. 서로 다른 정치 체제와 경제 이해관계를 가진 세 나라 사이에서 실효성 있는 논의에 도달하기는 역시나 쉽지 않다는 현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난 것이다.
FTA, 6년간 중단 뒤에도 격차 여전
이번 한중일 경제통상장관 회의에서는 2019년 이후 중단됐던 3국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의 재개 필요성에 대해서도 뜻을 모았다. 그러나 실제 협상이 재개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핵심 문제는 각국이 추구하는 FTA의 수준과 범위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한국과 일본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고품질 FTA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원산지 기준의 완화, 디지털 무역, 탄소중립 관련 조항 등 최근 자유무역협정에서 강조되는 진보적인 요소를 포함하기를 원한다. 반면 중국은 이러한 고수준 FTA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며 기존에 체결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수준의 협정을 희망하고 있다.
FTA 협상과 관련된 민감 사안으로는 농산물 시장 개방, 서비스 산업 진입 확대, 국가 보조금 투명성 등이 있다. 한국의 경우 농민단체의 반발을 고려해야 하고, 일본은 금융 및 정보통신 산업의 자율성 보장을 요구한다. 중국은 산업 보조금 문제와 국영 기업의 시장 행위와 관련된 저항 요소가 크다. 결국 이러한 사안들이 고품질 FTA를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미중 경제 안보 경쟁이 격화되면서, 한국과 일본은 안보 문제와 공급망 안정성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 특히 미국 주도의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참여하면서 중국과의 FTA 협상에서 서구식 규범을 강하게 반영해야 하는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했다. 중국은 이에 대해 자국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전략을 펴며 FTA 재개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장관들은 FTA 체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건설적 논의를 지속해 나가자"는 데 입을 모았다. 다만 실제로 협상이 재개되고 타결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복잡한 외교적 계산과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한다. FTA가 체결된다면 동북아 경제권의 통합에 큰 동력이 되겠지만, 현실적인 과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다.
경제통상장관 회의의 상징성과 향후 과제
이번 회의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여러 국제적인 정치·경제적 위기 이후 처음 진행된 고위급 만남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한중일 3국은 동북아 경제의 80%를 차지하며, 세계 GDP의 약 25%를 구성하는 핵심 경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서울 회동은 상징적인 차원에서 "이해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시작"이라는 평가도 받을 만하다.그러나 상징성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협의가 필수적이다. 일회성 회동에 그치지 않도록 정기적인 개최 일정을 수립하고, 실무급 차원의 협력 체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중일 각각의 정치 상황 변화에 따라 논의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을 단기적 이벤트가 아닌 중장기 계획 수립을 통해 극복해야 한다.
향후 과제로는 다음 세 가지가 꼽힌다. 1. 실무협의체 구성 및 정례화 3국 통상 관련 공무원과 산업계 전문가를 중심으로 한 실무협의체를 구성해, 큰 틀의 장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실질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2. 상호 신뢰 구축 중심의 소통 강화 상호간에 불신을 줄이기 위한 정보 교류, 공동 조사 및 전문가 세미나 등의 비공식 협의 채널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 특히 기술 안보, 디지털 통상, 기후 변화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명확한 소통이 필요하다. 3. 다자주의 질서 복원을 위한 공동 입장 조율 WTO 등 다자 기구에서 3국이 공동 대응을 모색하려면 사전에 충분한 논의와 공감대 조성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WTO 개혁 같은 글로벌 의제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북아를 넘어 글로벌 무역 질서 안에서 한중일이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어떤 선언을 했는가' 보다는 '어떤 실천을 했는가'가 앞으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정치적 긴장과 외교적 변수들이 존재하더라도, 경제 협력이라는 명확한 목표 아래 실질적 진전을 도모하는 노력이 절실하다.